“충전 플러그를 꽂는다. 충전이 시작된다.”

사용자 눈에는 단 두 단계지만, 그 찰나의 순간 충전 케이블 속 데이터 라인에서는 초당 수천 번의 암호화된 대화가 오갑니다.

현대차그룹이 확대하겠다고 밝힌 PnC(Plug and Charge) 기술의 심장은 바로 국제 표준 ISO 15118이며, 그 혈액은 PKI(공개키 기반 구조)라는 보안 기술입니다. 도대체 자동차는 어떻게 신용카드 없이도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고 결제까지 해내는 걸까요?

PnC의 핵심 기반은 '공개키 기반 구조(PKI, Public Key Infrastructure)'
사용자 눈에는 충전기를 꽂는 단순한 동작 하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복잡하고 정교한 보안 기술이 작동한다. PnC의 핵심 기반은 ‘공개키 기반 구조(PKI, Public Key Infrastructure)’다. (이미지. 아이씨엔 미래기술센터, by Gemini)

1. 전력망과 대화하는 언어, ISO 15118

과거의 전기차 충전 통신(PWM, CAN 등)은 단순했습니다. “전기 줘”, “알았어”, “그만 줘” 정도의 신호만 주고받았죠. 하지만 ISO 15118은 다릅니다. 이는 전기차(EV)와 충전기(EVSE) 사이의 고고도 지능형 통신 프로토콜입니다.

  • TCP/IP 기반 통신: 우리가 인터넷을 쓸 때 사용하는 통신 규약을 충전기에 적용했습니다. 즉, 전기차가 하나의 ‘움직이는 서버’가 되어 충전기와 데이터를 주고받습니다.
  • 스마트한 데이터 교환: 단순히 전력량만 제어하는 게 아니라, 차량의 배터리 잔량(SoC), 배터리 건강 상태(SoH), 요금 정보, 인증서 등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합니다.

이 ISO 15118 표준 위에서 구현되는 핵심 기능이 바로 PnC입니다.

2. 디지털 여권의 원리: PKI (Public Key Infrastructure)

PnC가 가능한 이유는 전기차 안에 ‘위조 불가능한 디지털 신분증’이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현하는 기술이 블록체인이나 금융 보안에서 쓰이는 PKI(공개키 기반 구조)입니다.

이 과정은 마치 우리가 해외여행을 갈 때 여권을 제시하고 입국 심사를 받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핵심 구성 요소

  1. OEM 프로비저닝 인증서 (Provisioning Certificate): 차량 제조 시 부여되는 ‘출생 증명서’입니다. 차대번호(VIN)처럼 변경 불가능한 고유 식별자입니다.
  2. 계약 인증서 (Contract Certificate): 사용자가 충전 사업자(CPO)와 맺은 요금제 정보가 담긴 ‘비자(Visa)’와 같습니다. 이 안에 결제 정보가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3. 루트 인증 기관 (Root CA): 이 모든 인증서가 진짜임을 보증하는 최상위 기관입니다. (일종의 정부 역할)

작동 원리: 비대칭 키 암호화

차량과 충전기는 수학적으로 짝을 이루는 두 개의 키(Key)를 사용합니다.

  • 공개키 (Public Key): 누구나 알 수 있는 키. 데이터를 잠그는(암호화) 역할.
  • 개인키 (Private Key): 차량 깊숙한 보안 영역(HSM)에 숨겨진 키. 잠긴 데이터를 여는(복호화) 역할.

충전기가 “너 진짜 가입된 차량 맞아?”라고 암호를 보내면(Challenge), 차량은 자신만이 가진 개인키로 이를 풀어(Response) 정당한 사용자임을 증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카드 정보가 해킹되거나 복제될 위험은 “0”에 수렴합니다.

3. PnC가 작동하는 5단계 시나리오 (The Handshake)

현대차 아이오닉 5를 이피트(E-pit) 충전기에 꽂았을 때,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TLS(Transport Layer Security) 보안 세션이 열립니다.

  1. 연결 및 탐색: 케이블이 연결되면 충전기는 자신이 ISO 15118을 지원함을 알립니다.
  2. 보안 터널 형성: 차량과 충전기 사이에 암호화된 통신 터널(“LS”, Handshake)을 뚫습니다. 이제 외부 도청은 불가능합니다.
  3. 신분 증명 (Authorization): 차량이 ‘계약 인증서’를 충전기에 전송합니다. “나 현대차 회원이고, 결제는 이 코드로 해줘.”
  4. 검증 (Validation): 충전기는 이 인증서가 유효한지 상위 시스템(OCPP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합니다. “이 인증서, 만료 안 됐지?”
  5. 충전 승인: 검증이 완료되면 즉시 전력 릴레이(Relay)가 붙으며 충전이 시작됩니다.

4. PnC 탄생 개념과 국제 표준화

PnC의 개념적 기원은 테슬라의 ‘슈퍼차저’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테슬라는 자사 차량과 충전기만 연결하면 자동으로 인식하고 결제되는 폐쇄적인 시스템을 일찌감치 구축해 압도적인 사용자 경험(UX)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다른 완성차 업체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지요.

하지만 문제는 표준화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자동차 제조사와 제각각인 충전 사업자들이 모두 호환되는 시스템을 만들려면 공통의 언어가 필요했지요. 마치 모든 주유소에서 어떤 신용카드로든 결제가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국제표준화기구(ISO)를 중심으로 논의가 시작되었고, 차량과 충전기 간의 통신 규약인 ‘ISO 15118’ 표준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표준의 핵심이 바로 PnC입니다.

5. 왜 ISO 15118인가? : PnC 그 너머의 세상

현대차그룹을 비롯한 글로벌 제조사들이 복잡한 ISO 15118을 채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결제 편의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V2G(Vehicle-to-Grid)에 있습니다.

  • 양방향 전력 전송: 전기차 배터리의 남는 전기를 전력망에 되팔거나(V2G), 가정용 전력으로 쓰려면(V2H) 고도의 통신 제어가 필요합니다.
  • 스마트 그리드: 전력망의 부하 상태에 따라 충전 속도를 조절하거나 방전을 지시하려면, 충전기와 차량이 실시간으로 “지금 전기 요금이 얼마야?”, “지금 전력망이 불안정해?” 같은 정보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표준이 ISO 15118입니다.

보안은 곧 신뢰다

PnC의 확대는 전기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전력망에 연결된 결제 단말기’이자 ‘에너지 저장 장치(ESS)’로 진화했음을 의미합니다.

현대차그룹이 12개 사업자와 제휴를 맺고 보안 인증 체계를 통합한다는 것은, 향후 열릴 V2G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디지털 고속도로’를 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충전한다”는 행위조차 잊게 될 것입니다. 기술이 가장 완벽해지는 순간은, 기술이 사용자의 의식 속에서 사라질 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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