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LG엔솔·SK온의 기술 혁신과 피지컬 AI·데이터센터까지 아우르는 차세대 배터리 생태계의 진화

스마트폰부터 전기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이르기까지 현대 디지털 문명을 움직이는 핵심 에너지원은 리튬이온 배터리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종종 들려오는 전기차 화재 뉴스나 배터리 발열 문제는 사용자들에게 늘 불안감을 안겨준다.
현재 쓰이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내부 구조를 비유하자면 양극과 음극이라는 두 언덕 사이에 인화성 액체로 채워진 수영장이 있고, 두 언덕이 직접 부딪히지 않도록 얇은 가림막인 분리막이 세워져 있는 형태다. 리튬 이온들은 이 액체 수영장을 헤엄쳐 다니며 전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외부 충격이나 내부 단락으로 분리막이 찢어지면 액체 전해질에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폭발적인 열폭주 현상으로 이어진다.
전고체 배터리는 바로 이 액체 수영장을 불에 타지 않는 견고한 고체 도로로 전면 교체한 차세대 이차전지다. 전해질이 고체로 바뀌면서 액체 누출이나 가스 발생 위험이 근본적으로 사라진다. 더욱이 고체 전해질 자체가 양극과 음극을 물리적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겸하기 때문에 기존의 분리막조차 필요 없어진다. 불안정한 인화성 물질을 제거함과 동시에 화재 예방을 위해 배터리 팩 둘레에 겹겹이 두르던 무거운 방화 장치와 냉각 설비까지 대폭 줄일 수 있게 된다.
[응용처 확장] 삼성SDI, ‘피지컬 AI’ 파우치 전고체와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전격 공개
이러한 전고체 기술은 전기차를 넘어 인간형 로봇과 AI 인프라로 영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삼성SDI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2026’에서 ‘AI thinks, Battery enables(AI의 상상, 배터리가 현실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휴머노이드 로봇 등 피지컬 AI용으로 개발 중인 파우치형 전고체 배터리 샘플을 최초로 공개했다.
로봇은 탑재 공간이 제한적이어서 크기가 작으면서도 에너지 밀도가 높아야 하며, 관절을 움직일 때 발생하는 순간적인 전력 피크를 견딜 고출력 성능이 필수적이다. 삼성SDI는 기존 전기차용 각형 전고체 배터리에 더해 경량화에 유리한 파우치 폼팩터를 다변화함으로써 로봇, UAM, 차세대 웨어러블 시장을 선점한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삼성SDI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안정성을 책임질 초고출력 배터리 솔루션도 대거 선보였다. 무정전 전원장치(UPS)용 배터리 ‘U8A1’은 각형 폼팩터에 LMO(리튬망간산화물) 소재를 적용해 고출력과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했으며, 공간 효율을 33% 높여 전력 급증 시 수월하게 전력 품질을 안정화한다.
서버용 배터리 백업 유닛(BBU)에는 하이니켈 NCA 양극재와 SCN 음극재를 적용한 원통형 배터리를 탑재하고 하부 벤트 기술을 적용해 안전성을 높였으며, 정전 시 데이터 저장 대기시간을 50% 이상 늘려 AI 시대의 핵심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한다.
[소재 혁신] LG에너지솔루션, 고체 전해질로 ‘황(Sulfur)’ 양극재의 한계 극복
배터리 용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소재 차원의 혁신도 전고체 기술을 만나 빛을 발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시카고대학교 셜리 멍(Shirley Meng) 교수 연구팀 및 UC샌디에이고(UCSD) 연구진과 공동으로, 양극재로 ‘황(Sulfur)’을 적용한 전고체 배터리 구현에 성공했다. 연구 결과는 에너지 분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게재되며 학계와 산업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황은 자원이 풍부하고 가격이 저렴한 데다 이론 용량이 약 1675mAh/g에 달해 꿈의 양극 소재로 불렸으나, 기존 액체 전해질 환경에서는 충·방전 중 황 화합물이 녹아 나오는 ‘폴리설파이드 용출’ 현상 탓에 수명이 급격히 저하되는 문제가 있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액체 전해질 대신 고체 전해질을 도입해 용출이 일어나는 환경을 원천 차단했다. 이를 통해 실제 파우치 셀 상태에서 약 1500mAh/g 수준의 높은 용량과 안정적인 수명을 검증해 내며 차세대 고용량 배터리의 상용화 가능성을 입증했다.
[공정 혁신] SK온, ‘WIP-프리’ 파일럿 플랜트 구축으로 2029년 상용화 조기 달성
꿈의 기술을 양산 무대로 올리기 위한 공정 기술의 진화도 가속화되고 있다. SK온은 대전 미래기술원 내에 약 4,628m²(약 1,400평) 규모의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플랜트를 준공하고 차세대 배터리 상용화 시점을 기존 2030년에서 2029년으로 1년 앞당기기로 했다. 이 시설은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와 리튬 메탈 배터리를 집중 연구하며, 초기 800Wh/L 수준의 에너지 밀도를 구현한 뒤 장기적으로 1000Wh/L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특히 SK온은 대량 생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공정 속도 문제를 ‘온간등압프레스(WIP) 프리’ 기술로 극복했다. 기존 고체 배터리는 전극 밀도를 높이기 위해 25~100℃ 고온에서 균일한 압력을 가하는 WIP 공정이 필수적이었지만, 밀봉과 자동화가 어려워 생산성이 떨어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SK온은 활물질과 도전재의 혼합 조건을 자체 개발해 내부 저항을 줄이고 일반 프레스 공정을 최적화함으로써, WIP 공정 없이도 고성능과 대량 생산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시장 전망] 연 30% 급성장… 2035년 60조 원 시장과 차세대 에너지 플랫폼
전고체 배터리의 파급력은 단순한 승용 전기차 시대를 넘어 더욱 넓은 첨단 산업 생태계로 확산되고 있다. 가볍고 강력하면서도 절대 불이 나지 않는 특성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하늘을 나는 도심항공교통 기체, AI 데이터센터용 고출력 백업 전원 등 고도의 안전성과 신뢰성이 요구되는 애플리케이션의 필수 조건이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주도하는 소재, 공정, 애플리케이션 다변화 혁신은 단순한 에너지 저장 장치를 넘어 미래 AI 산업 전반의 지형을 바꾸는 거대한 동력이 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프레시던스 리서치(Precedence Research)에 따르면, 글로벌 전고체 배터리 시장 규모는 2025년 16억 3,000만 달러에서 2026년 22억 2,000만 달러로 증가하며, 이후 연평균 34.56%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 2035년에는 약 317억 1,000만 달러(약 4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EV) 산업의 상용화 단계 진입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녹색 혁신이 이러한 시장 확대를 강력하게 이끌고 있다. 기존의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하는 이 기술은 높은 에너지 밀도, 뛰어난 공간 효율성, 급속 충전 속도, 그리고 무엇보다 폭발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인 안전성을 자랑한다. 여기에 웨어러블 기기, 의료용 장비, IoT, 에너지 수확 기술 등 적용 분야가 다각화되면서 시장의 수익 구조도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기술 트렌드: AI 기술의 융합과 과감한 R&D 투자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를 앞당기는 핵심 동력 중 하나는 인공지능(AI)이다. 배터리 제조사들은 생산 시간을 단축하고 고품질 배터리를 개발하기 위해 AI 플랫폼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AI는 최적의 충전 방식을 설계하고 배터리 수명을 예측 및 연장하며, 사용자 맞춤형 배터리 설계를 가능하게 한다. 일례로 2024년 6월 하니웰(Honeywell)은 AI 기반의 ‘Battery MXP’ 플랫폼을 출시하여 배터리 제조 비용 절감과 생산 효율화를 선도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기업의 투자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2023년 9월 전기차 및 포터블 기기용 전고체 리튬 배터리 개발을 위해 1,600만 달러의 투자를 발표한 바 있다. 다만,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의 성능을 3배 향상시키는 실리콘 음극재 배터리, 수명이 최대 8배 길어진 플루오린 배터리, 그래핀 및 암모니아 배터리 등 다양한 대안 기술과의 경쟁 및 양산 단가 인하는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