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타협하지 않는 심장’, 전기차를 넘어 모든 것을 바꾸러 온다
글_ 오승모 수석연구위원, 아이씨엔 미래기술센터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보고, 노트북으로 일하며, 전기차로 이동하는 ‘모바일 혁명’의 중심에는 ‘리튬이온(Li-ion) 배터리’라는 위대한 심장이 있었다. 1991년 상용화된 이래, 리튬이온 배터리는 인류에게 전례 없는 자유를 선물하며 세상을 바꿔왔다. 하지만 영원한 왕은 없듯, 영광의 시대 저편에서는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우리는 종종 뜨거워진 스마트폰에 불안감을 느끼고, 전기차 화재 뉴스를 보며 가슴을 졸인다. 이는 현재의 배터리가 ‘액체’라는 본질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액체 전해질은 특정 조건에서 불이 붙기 쉬운 가연성 물질이며, 에너지 밀도를 높이기 위해 양극과 음극재를 더 많이 채워 넣을수록 위험은 커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성능의 한계도 명확해지고 있다. 한 번 충전으로 1,000km를 달리고, 단 몇 분 만에 충전이 완료되는 꿈의 전기차는 현재의 리튬이온 배터리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다.
결국 인류는 다시 한번 새로운 심장을 찾아 나섰다. 더 안전하고, 더 오래가며, 더 자유로운 형태를 가진 배터리. 바로 ‘전고체(All-Solid-State) 배터리’가 그 주인공이다. 지금, 전 세계는 이 꿈의 기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전고체 배터리, 기본부터 완전 정복
전고체 배터리란 무엇인가?: 액체를 고체로, 발상의 전환
배터리의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양극(+)과 음극(-) 사이를 리튬 이온이 오가며 전기를 만들고 저장한다. 이때 이온들이 헤엄쳐 다니는 길, 즉 매개체가 바로 ‘전해질’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이 길을 액체로 만들었지만, 전고체 배터리는 이름 그대로 이 길을 ‘고체’로 바꾼 것이다.
이 간단한 발상의 전환은 배터리의 모든 것을 바꾼다. 액체 전해질을 사용하면 이온의 이동 통로인 ‘분리막’이 필수적인데, 고체 전해질은 스스로 분리막의 역할까지 겸하기 때문에 구조가 단순해진다. 불필요한 부품들이 사라진 공간에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활물질을 더 채워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액체에서 고체로, 이 단순한 변화가 바로 모든 혁신의 출발점이다.
전고체 배터리의 3대 핵심 특징: ‘게임 체인저’라 불리는 이유
① 절대적 안전성: 불붙지 않는 배터리의 탄생 가장 큰 변화는 단연 안전성이다. 고체 전해질은 불에 타지 않는 세라믹 소재 등으로 만들어져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다. 배터리에 구멍이 뚫리거나 강한 충격이 가해져도, 화재나 폭발의 위험이 거의 없다. ‘배터리는 위험할 수 있다’는 오랜 불안감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② 폭발적 에너지 밀도: 더 멀리, 더 오래 가는 전자기기 전고체 배터리는 에너지 저장 효율, 즉 에너지 밀도를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 분리막이 사라지고, 기존에 사용하기 어려웠던 고용량 음극재(리튬메탈 등)를 적용할 수 있어 같은 크기라도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담을 수 있다. 이는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1,000km에 육박하고, 스마트폰을 며칠에 한 번만 충전해도 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③ 디자인의 자유: 구부리고 접고,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배터리 액체 누출 위험이 없기 때문에 배터리의 형태를 매우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종이처럼 얇게 만들거나, 두루마리처럼 말 수도 있다. 이는 돌돌 마는 스마트폰, 옷처럼 입는 웨어러블 기기, 신체에 부착하는 의료 패치 등 지금까지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미래 디바이스를 현실로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시장의 흐름과 미래의 청사진
글로벌 시장 동향: 숫자로 보는 전고체 배터리의 미래 가치
전고체 배터리는 더 이상 연구실 속 기술이 아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전고체 배터리 시장은 2027년 본격적인 개화를 시작해 2030년에는 약 400억 달러(약 52조 원), 2035년에는 1,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성장률이 100%를 훌쩍 뛰어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세다.
가장 먼저 열릴 시장: ‘전기차’, 전고체 시대를 이끌다
이 거대한 시장의 문을 가장 먼저 여는 것은 단연 ‘전기차’다. 전기차 시장의 가장 큰 숙제인 주행거리 불안과 충전 시간, 그리고 화재 안전성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솔루션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기업들과 천문학적인 규모의 R&D 협력을 맺고 상용화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전고체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는 단순히 주행거리가 긴 차를 넘어, ‘움직이는 에너지 저장장치(ESS)’이자 생활 공간으로서 자동차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기대 적용 분야: 전기차를 넘어 모든 산업으로
전고체 배터리의 파급력은 전기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 도심항공교통(UAM): 높은 에너지 밀도와 절대적인 안전성은 ‘하늘을 나는 택시’의 핵심 전제 조건이다.
- 로봇: 더 가볍고 오래가는 배터리는 로봇의 활동 반경과 작업 효율을 극대화한다.
- 의료기기: 인체 삽입형 의료기기나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기의 소형화와 안전성을 보장한다.
결국 전기가 필요한 모든 곳에 전고체 배터리가 스며들어,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다.
왕좌를 향한 치열한 경쟁: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지금
2025년 현재, 전고체 배터리 왕좌를 향한 글로벌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각 플레이어들은 서로 다른 전략으로 정상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대한민국 K-배터리 3사: 초격차를 향한 질주
삼성SDI: 가장 발 빠른 행보를 보인다. 2023년 파일럿 라인(S-Line)을 구축하고 시제품 생산에 돌입했으며, 2027년 양산을 목표로 완성차 업체들과 긴밀히 협력 중이다. 독자적인 ‘무음극(Anode-less)’ 기술로 에너지 밀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LG에너지솔루션: 고분자계와 황화물계 전고체 기술을 동시에 개발하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한다. 미국 샌디에이고의 스타트업 ‘팩토리얼 에너지’와 협력하며 차세대 기술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온: 미국 ‘솔리드파워’와의 협력을 통해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 라인을 일부 활용할 수 있는 공정 기술을 개발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의 반격: 완성차 업체의 역습, 도요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1,300여 개의 전고체 배터리 특허를 보유한 ‘조용한 강자’. 도요타는 2027~2028년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출시하겠다고 공언하며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10분 충전으로 1,200km를 주행하는 것을 목표로, 배터리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준비를 마쳤다.
미국과 유럽의 추격: 혁신 스타트업의 도전
퀀텀스케이프(QuantumScape): 폭스바겐이 투자한 미국의 대표적인 스타트업. 최근 자동차용 배터리 셀의 1,000회 충·방전 사이클 테스트를 통과하며 기술력을 입증했지만, 대량생산까지는 아직 과제가 남았다.
솔리드파워(Solid Power): BMW와 포드가 투자한 기업으로, SK온과도 협력 관계다. 대량생산에 유리한 황화물계 기술에 집중하며 상용화 속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야망: ‘반고체’를 발판 삼아 시장을 넘보다
중국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
- 정부 주도의 거대한 그림: 중국 정부는 CATL, BYD 등 주요 기업과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CASIP’ 플랫폼을 출범, 2030년까지 전고체 배터리 산업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 CATL & BYD의 투 트랙 전략: 완전한 전고체 기술 개발과 동시에,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에 고체 전해질을 일부 섞은 ‘반고체(Semi-solid-state) 배터리’의 조기 상용화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기술적 난이도가 낮아 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2027년 양산 목표: CATL을 비롯한 여러 중국 업체들은 2026~2027년 사이 반고체 배터리를 양산해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공격적인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는 시장의 ‘표준’을 선점하려는 거대한 야망의 표현이다.
결론; 기술 경쟁을 넘어 ‘속도전’으로, 미래 시장의 승자는 누구인가?
전고체 배터리로 가는 길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고체 전해질과 전극 사이의 저항을 줄이는 ‘계면 안정성’ 확보, 수천 번의 충·방전에도 성능이 유지되는 ‘수명’, 그리고 무엇보다 비싼 원자재와 복잡한 공정에서 비롯되는 ‘가격’이라는 마지막 허들이 남아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허들을 넘기 위한 접근법이 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승부의 갈림길: 원천 기술 vs. 시장 선점
한국과 일본은 최고의 성능과 안전성을 갖춘 궁극의 ‘전고체’ 배터리 원천 기술을 확보해 시장을 제패하려는 ‘품질전’에 집중하고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번에 시장의 판도를 뒤집겠다는 정공법이다. 반면, 중국은 완전한 기술이 구현되기 전에 ‘반고체’라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시장에 먼저 진입해 고객을 확보하고 생태계를 장악하려는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결국 미래 시장의 시나리오는 두 갈래로 나뉜다. 과연 중국의 실용주의가 시장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K-배터리와 일본의 기술 초격차가 시장의 판도를 뒤집을 것인가?
분명한 것은, 전고체 배터리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 치열한 경쟁의 끝에서 누가 승자가 되든, 인류는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전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혁명의 중심에서 펼쳐지는 거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은 더없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